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1. 몇 달 전에 이 책을 읽었다.

책을 읽으면서 리뷰가 됐든 메모가 됐든, 무언가 이 책에 관한 것을 남기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지금에서야 이렇게 이 책에 관한 언급을 하게 되었다.

책을 읽으면서, 몇 달 정도 지나 이 책의 내용을 어느 정도 잊어버리게 되었을 때 이 책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이게 뭔 개풀 뜯어먹는 소리일까.

예를 들면, 나는 군대에서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라는 책을 읽었는데, 시간이 오래 지나서 등장인물이라든가 줄거리는 거의 기억에 남아 있지 않다.

그런데 기억에 남는 것이 있다.

책을 읽을 당시의 나의 기분이나 심리상태 같은 것들이다.

그리고 후각적인 어떤 것.

예전에 들었던 노래를 다시 들으면서 이와 비슷한 경험을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어쨌든, 그렇다면, 결국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 책에 관한 이야기라기보다는 나의 이야기이다.

나는 그저 이 책을 읽을 당시의 나의 마음에 대해 이야기해 보고 싶었나보다.

조금 시간이 지나서 이것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건, 어느 정도 나를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다.

스스로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가 있는 것 같다.

하나는 공간을 이용하는 방법이다.

스스로가 타인이 되어 - 물론 실제로 타인이 되는 것은 아니고, 그렇게 되었음을 강력하게 가정하는 것일 수 밖에 없다 - 외부의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시간을 이용하는 방법이다.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났을 때 과거의 나를 되돌아 보는 것이다.

나는 이번에는 시간을 이용하는 방법을 쓰고 있다.

즉, 나는 이번에는 이 책과 연결되어 있는 과거 어느 시점의 나를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싶은 것이다.

 

2. 그래도 어찌되었든, 이 책의 줄거리를 대강이나마 이야기하고 싶은데, 나는 그럴 자신이 없다.

그래서 무라카미 하루키 본인이 이 책에 관한 언급한 것을 옮겨 보겠다.

 

 

하루키는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라는 에세이에서 이 책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 구체적인 사례로 최근에 출간한 내 소설을 얘기해볼까요. 장편소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에는 기모토 사라라는 상당히 멋진 여성이 등장합니다. 실은 이 작품은 원래 단편으로 할 생각으로 쓰기 시작했습니다. 200자 원고지로 약 120매를 예상하고.

   줄거리를 간단히 설명하자면, 주인공 다자키 쓰쿠루는 나고야 출신으로, 고교 시절에 친하게 지내던 네 명의 친구에게서 절교를 당합니다. "이제 너는 보고 싶지 않다. 말도 섞기 싫다"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설명해주지 않습니다. 그도 굳이 묻지 않았습니다. 다자키 쓰쿠루는 도쿄의 대학에 들어가고 도쿄의 철도 회사에 취직해 이제 서른여섯 살이 되었습니다. 고교 시절의 친구들에게서 이유도 모른 채 절교당한 일은 마음에 깊은 상처로 남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것을 깊숙한 안쪽에 감춰두고 현실적으로는 온화한 인생을 보냅니다. 회사 일도 순조롭고 주위 사람들에게도 호감을 얻고 연인도 몇 명 사귀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누구와도 정신적으로 깊은 관계를 맺지 못합니다. 그러다가 두 살 연상의 사라를 만나 연인 관계가 됩니다.

   그는 뭔가 얘기 끝에 고교 시절의 친한 친구 네 명에게서 거부당했던 체험을 사라에게 말합니다. 사라는 잠시 생각해보더니, 즉시 나고야로 돌아가 십팔 년 전에 그곳에서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봐야 한다고 쓰쿠루에게 말합니다. "(너는) 네가 보고 싶은 것만 볼 게 아니라 꼭 봐야 할 것을 봐야 해"라고.

   사실 나는 사라가 그런 말을 하기 전까지 다자키 쓰쿠루가 그 네 명의 친구를 만나러 간다는 건 생각도 못했습니다. 나는 그가 자신의 존재를 부정당한 이유도 알지 못한 채 인생을 조용히, 미스터리하게 살아가야 했다, 라는 비교적 짤막한 이야기를 쓸 예정이었습니다. 하지만 사라가 그렇게 말하는 바람에(그녀가 쓰쿠루를 향해 하는 말을 나는 그대로 받아썼을 뿐입니다) 나는 쓰쿠루를 나고야에 보내야 했고 결국에는 핀란드에까지 보내게 됐습니다. 그리고 그 네 친구가 어떤 사람들인지, 각각의 캐릭터를 새롭게 만들어야 했습니다. 그들이 걸어온 각각의 인생도 구체적으로 그려내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그 결과, 당연한 얘기지만, 이 이야기는 장편소설이라는 체재를 취하게 됐습니다.

   즉 사라의 말 한 마디가 거의 한 순간에 이 소설의 방향과 성격과 규모와 구조를 바꿔버린 것입니다. 이건 나 스스로도 깜짝 놀랐습니다. 생각해보면 그녀는 주인공 다자키 쓰쿠루가 아니라 실은 작자인 나를 향해 말을 건넸던 것입니다. "너는 이제 그다음 스토리를 써야 한다. 너는 그 영역에 이미 발을 들였고 이미 그만한 능력을 갖고 있으니까"라고. 요컨대 사라 역시 나의 분신의 투영이었다는 얘기인지도 모릅니다. 그녀는 내 의식의 또 다른 모습으로서 나에게 지금 이 지점에 안주하고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짚어주었습니다. "좀 더 깊이 파고들어 글을 써라" 하고. 그런 의미에서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는 나에게는 결코 적지 않은 의미를 가진 작품입니다. 형식은 이른바 '리얼리즘 소설'이지만 수면 아래에서는 다양한 일들이 복합적으로, 또한 은유적으로 펼쳐진 소설이라고 생각합니다.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250~252쪽 中)

 

3. 이 책을 읽을 무렵 나는 좀 우울했다.

그래서 그런지 책의 첫 부분부터가 나에게 강렬하게 흡수되었다.

 

- 대학교 2학년 7월부터 다음 해 1월에 걸쳐 다자키 쓰쿠루는 거의 죽음만을 생각하며 살았다. 그사이 스무 살 생일을 맞이했지만 그 기념일은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그런 나날 속에서 그는 스스로 생명을 끊는 것이 무엇보다 자연스럽고 합리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왜 마지막 한 걸음을 내딛지 못했는지, 지금도 그는 이유를 잘 모른다. 그때라면 삶과 죽음을 가르는 문지방을 넘어서는 일 따위 날달걀 하나 들이켜는 것보다 간단했는데.

   쓰쿠루가 실제로 자살을 시도하지 않은 것은 어쩌면 죽음에 대한 마음이 너무도 순수하고 강렬하여 거기에 걸맞는 구체적인 죽음의 수단을 마음속에 떠올릴 수 없어서였을지도 모른다. 구체성은 오히려 부차적인 문제였다. 만일 그때 손이 닿는 곳에 죽음으로 이어지는 문이 있었다면 그는 거침없이 열어젖혔을 것이다. 깊이 생각할 것도 없이, 말하자면 일상의 연속으로서. 그러나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는 가까운 곳에서 그런 문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때 죽었더라면 좋았을지도 몰라. 쓰쿠루는 자주 그런 생각을 한다. 그랬더라면 지금 여기 있는 세계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건 매혹적인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 있는 세계가 존재하지 않게 되고, 여기에서 현실이라 부르는 것들이 현실이 아니게 된다는 것. 이 세계에 그 자신이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은 이유로 자신에게 이 세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7~8쪽 中)

 

4. 세상에는 두 가지 종류의 고민이 있다.

말할 수 있는 고민과 말할 수 없는 고민.

그 중간의 애매한 영역이 있을 수도 있다.

가령, 특별한 누군가에게만 말할 수 있는 고민이라든가, 자신을 전혀 모르는 낯선 타인에게만 말할 수 있는 고민 같은.

그러나 그런 고민은 따지고 보면 말할 수 있는 고민에 포함된다.

 

고민을 말할 수 없는 이유 또한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는 창피하거나 부끄러워서 숨기고 싶기 때문에.

둘째는 표현하거나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이 없어서.

 

이 책을 읽을 무렵, 나는 위의 두 번째 이유로 말할 수 없는 고민이 있었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은 그 고민을 표현하거나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았을까.

안타깝게도 그러지는 못하였다.

다만 그 고민이 사라지기는 하였다.

해결되어 없어진 건지, 아니면 해결되지 못한 채로 파묻힌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어쨌든 나의 의식에서 사라진 것은 맞다.

 

5. 그런데 과연 고민이 사라진 것이 맞을까.

나도 사라 같은 여인을 만나, 언젠가 내가 아주 깊게 상처 입었음을, 그리고 그 상처가 아직까지도 고스란히 남아있음을 깨닫게 되는 날이 오지는 않을까.

그것은 진정한 치유의 시작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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