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명상 이야기

 

언젠가 명상에 관한 이야기를 한번 하고 싶었다.
그러나 늘 자신이 없었다.
내가 감히 명상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을까.
명상에 관해 더 많이 알게 된 다음에 이야기를 해야지.
정신이 아주 맑고 또렷해지는 때를 기다렸다가 그때 이야기를 해야지.
그런데 그런 날은 안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컨디션이 그리 좋지 않은 지금, 그냥 의식의 흐름에 따라 무언가를 이야기해 보려 한다.

사실 이것은 명상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나에 관한 이야기일 것이다.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하든, 치킨에 관한 이야기이든, 정치에 관한 이야기이든, 리처드 파인만에 관한 이야기이든, 라마교에 관한 이야기이든, 결국 그것은 나의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결국 어떤 대상에 투영되는 나를 발견하고 싶은 것이다.

나는 2008년에 군을 제대하고 대학교에 복학하였다(사실 더 거슬러 올라갈 수도 있지만, 이 즈음부터 언급하는 것이 적절할 것 같다).
나는 경제학과였지만 모두 법학과 수업을 신청해 수강하였다.
군대에서 법에 관심이 생겼기 때문이다.
군대에서 법에 관심이 생긴 것은 친한 동료 병사가 억울하게(정말로 억울했다) 영창을 가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군대에서의 일을 간략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지극히 나의 관점에서 필요한 부분만 정말 간략히 이야기하는 것이다).
나는 2006년 2월에 군대에 입대했는데, 그 무렵은 2006년 말 내지는 2007년 초였다.
등장인물은 K분대장, W상병, D상병, T이병, H본부대장, 그리고 나(당시 일병)이다.
우리 부대는 사단 본부대였는데, 간단히 말하면, 사단 사령부에서 일하는 행정병들이 모여있는 부대였다.
K분대장은 못되고 영악하고 후임들을 잘 괴롭혔다(정말 후려쳐서 한 표현이다).
나는 W상병, D상병과 친했다.
어느 날  W상병, D상병과 나는 상부에 K분대장의 만행을 보고하자는 모의(?)를 하였다.
다른 몇 명과 더 뜻을 합쳐 조직적으로 움직이자는 것이었다.
얼마 후 나는 우리의 뜻을 T이병에게 전달했다.
T이병이 K분대장 때문에 힘들어 했던 걸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에 패착이 있었다.
T이병이 D상병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D상병이 업무와 관련하여 T이병을 혼낸 적이 몇 번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T이병이 D상병을 싫어하는 감정이, T이병이 K분대장을 싫어하는 감정보다 더 강했던 모양이다.
T이병은 나와 W상병, D상병의 모의 내용을 K분대장에게 그대로 전달하였다.
K분대장은 영악하고 주도면밀했다.
자신이 그러한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을 숨기고, 먼저 자신에게 유리한 여론을 조성하기 위한 작업에 착수했다.
자신의 편이 될만한 병사들을 포섭하고, 나와 W상병, D상병의 약점을 파헤쳤다.
그리고 먼저 선수를 쳐서 H본부대장에게 나와 W상병, D상병이 항명을 모의한 사실과 그 전에도 항명에 가까운 행동들을 해왔다는 내용의 보고를 했다.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의 보고를 했는지는 모른다.
그렇지만 과장과 왜곡이 포함된, 상당히 그럴듯하고 설득력 있는 내용이었을 것임은 분명하다.
K분대장의 보고 이후 나와 W상병, D상병은 징계절차에 회부되었다.
헌병대 조사 같은 걸 받은 건 아니고, 본부대의 자체 조사를 받았다.
지금은 그때의 기억을 떠올려도 담담한 마음이지만, 당시에 나는 정말 커다란 공포감을 느꼈다.
아무튼 결과적으로 나와 W상병은 징계를 받지 않았다.
징계를 하기에는 너무 가혹하다는 판단이었고 부대 내의 여론도 그랬던 것 같다.
그러나 D상병은 징계를 피할 수 없었다.
당시 D상병은 선임들로부터 다소 건방지다는 평가를 받고 있었는데, 나는 이것이 D의 솔직함과 어느 정도의 강직함 때문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당시 D상병에 대한 징계사유를 정하기가 마땅치 않았다고 한다(나중에 D상병에게 들은 이야기이다).
K분대장의 만행을 상부에 보고하자고 모의(?)한 것만으로는 징계사유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 중론이었다.
결국 D상병은 밥을 몇 번 먹지 않은 것을 사유로 징계를 받았다(엄밀히는 밥을 먹으라는 명령을 위반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우리 부대는 행정병들이 모여있는 부대였는데, 바쁘게 업무를 하다보면 제때 밥을 먹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고 때로는 식사를 거르기도 하였다.
즉, D상병과 같은 사유라면, 누구라도 징계의 대상이 될 수 있었다.
H본부대장은 일단 D상병을 징계하기로 결정하였고, 그 후에 어떻게든 징계사유를 만들어 내고 말았던 것이다.
D상병은 중징계를 받았다.
영창 15일과 타부대 전출.
그 이후로 나는 군생활 내내 D상병을 볼 수 없었다.
나는 K분대장보다도 H본부대장에 대하여 분노했다.

곁가지가 너무 길었다. 
아무튼 나는 그리하여 법에 관심이 생겼고, 제대를 하고 법학 수업을 들었고, 내친 김에 사법시험까지 준비하게 되었다(그런데 이 얘기도 곁가지인 건 마찬가지다).
제대한 다음 해인 2009년에 처음으로 사법시험 1차 시험에 응시하였다.
결과는 낙방이었지만, 객관식 한 문제 차이의 아까운 낙방이었다.
나는 약간의 자신감을 가지고 다음 해 시험을 준비하였다.
그리고 2010년 사법시험 1차 시험에 합격하였다.
사법시험은 해마다 한번 씩 있고, 1차 시험에 합격하면 두 번 2차 시험을 볼 기회가 주어진다(이제 올해를 마지막으로 사법시험이 폐지되었으니, 정확히는 과거형으로 표현해야 옳을 것이다).
나는 2010년 2차 시험에는 불합격하였다.
그리고 다음해 2차 시험을 위해서 정말 열심히 공부하였다(정말 정말 열심히 하였다).
2011년 6월 말, 나는 정말 공들여 준비한 두 번째 사법시험 2차 시험을 치렀다.
합격자 발표는 10월 말이었다. 
합격자 발표 당일, 나는 너무 떨렸다(그 며칠 전부터 엄청 떨리긴 했다).
발표는 오후 5시경으로 예정되어 있었다.
점심 때쯤 나는 떨리는 마음을 달래고자 무작정 택시를 탔고, 북'악'산으로 가자고 했다.
그런데 택시기사님이 나를 내려준 곳은 북'한'산이었다.
뭔가 불길했다.
나는 불편한 신발을 신고 북한산을 올랐다.
마음을 진정시킬 수 없어서 정신 없이 걸어 올라갔다.
산을 내려왔을 때는 저녁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렇지만 아직 합격자 발표 시간은 아니었다.
나는 예전에 고시공부를 위해 6개월 정도 머물렀던 신림동으로 갔다.
그리고 혼자 저녁을 먹었다.
발표를 보면 밥을 먹지 못할 수도 있겠다는 예감에 일단 밥을 먹은 것이다.
밥을 먹고 나서 신림동 고시촌을 거닐었다.
그런데 어느 서점 앞에 합격자 명단이 붙어있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그 앞에 서서 명단을 살펴보았다.
아무리 살펴도 내 이름은 없었다.
혹시나 해서 근처 피씨방에 가서 인터넷으로도 명단을 확인해 보았다.
그래도 내 이름은 없었다.

엄청난 충격과 좌절이었다.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기분이었다.
어찌어찌하여 그 때 살고 있던 하숙집으로 돌아가긴 했다.
그런데 아무 것도 할 수 없었고 한숨도 잘 수 없었다.
다음 날 나는 학교에도 갈 수 없었다.
하숙집에도 있을 수 없었다.
그래서 무작정(또는 어쩔 수 없이) 본가에 내려갔다.
집에 며칠 머물면서 약간은 회복이 되었다.
다시 학교를 다닐 정도는 되었다.

그 무렵 나는, 내가 세상에서 제일 힘든 사람이다, 라고 생각하며 살았다.
하루하루가 정말 힘들었다.
다시 시험을 준비할 엄두도 나지 않았고, 그렇다고 다른 것을 할 엄두는 더더욱 나지 않았다.

여기서 잠깐 시험에 떨어진 기분을 대강이나마 설명하자면, 그것은 실연 당한 것과 다소 비슷하다.
다만 그 강도는 수십 배, 수백 배이다(물론 정말 고통이 큰 실연도 있을 것이므로 함부로 이렇게 단정하기는 어렵긴 하다).
내가 집착하던 대상으로부터 버림받은 기분.
나의 신체의 일부가 잘려 나간듯한 기분.

그때 나는 항상, 그리고 오랫동안 고통에 대해서 생각했다.
그러다가 문득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나의 고통은 결국 나의 '생각'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그 무엇도 아닌 나의 '생각'이 나를 계속 힘들게 하고 있었다.

그러고 나서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다.
시험을 한 번 더 준비해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다만, 꼭 붙어야 한다는 강박은 없어야 그럴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붙어야 한다는 마음은 어느 정도 내려 놓고, 편한 마음으로 공부를 했다.
그리고 다행히 그 다음 해인 2012년, 1차 시험과 2차 시험을 모두 합격하였다.

2012년에 2차 시험을 보고 나서, 나는 자연스럽게 명상을 접하게 되었다.
절실한 계기에 의해서 '고통', '생각', '마음'에 관심이 생겼고, 시간적인 여유도 생겨서 정말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었다.
그 해 여름에 해남 대흥사로 템플스테이를 갔다가 구담스님을 알게 되었고, 구담스님의 소개로 제따와나 선원을 알게 되었다.
제따와나 선원에서 일묵스님과 다른 여러 분들로부터 명상을 배울 수 있었다.

내가 명상에 일가견이 있다거나 어느 정도 수준이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냥 나는 명상에 관심이 있고 명상이라는 것을 좋아한다.
누군가 명상이 뭐냐고 물으면 나는 이렇게 대답한다.
고통의 원인을 찾아서 그것을 제거하는 것.

명상이라고 하면 보통 좌선(가부좌를 하고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하는 수행)을 떠올린다.
그러나 좌선은 명상의 일종일 뿐이다.
명상은 다양한 형태로 할 수 있다.
어떤 운동을 집중해서 하면 그것도 명상일 수 있다.

불교에는 '일체유심조'라는 말이 있다.
모든 것은 오로지 마음이 지어낸다는 말이다.
우리는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그리고 생각을 통한 경험을 하며 살아간다.
그 이상은 있을 수 없다.
저 멀리 외부에 있는 어떤 것에 대한 생각도 결국은 내면의 경험에 의한 것이고 내면의 작용이다.
결국 세상의 모든 비밀은 내면에 담겨있다고 생각한다.
명상은 이러한 내면을 탐구하는 일이다.
그리고 그것은 곧 세상의 비밀을 파헤치는 일이기도 하다.

명상을 이렇게도 정의할 수 있을 것 같다.
비밀을 파헤치는 것.

2017 11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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