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5ㆍ18) 이야기

 

1945815. 해방 이후 친일파는 청산되지 않았습니다. 광주(5ㆍ18) 이야기를 하는데 해방과 친일파 이야기가 왜 나오느냐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5ㆍ18은 단순히 전두환 정권과 그 무렵에 한정된 이야기가 아닙니다5ㆍ18은 한국 근현대사가 나은 비극입니다. 해방이 된 직후에 이승만이 남한에서 권력을 잡고 친일파가 여전히 득세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러한 정국은 대체로 미군에 의하여 조성되었습니다. 미군은 우리 민족의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성찰하지 않았습니다. 남의 일이니 당연히 그럴 수밖에요. 남 일에 대해서는 자신의 이익과 결부되어 있는 것에 한하여만 관심을 가지는 것이 인지상정입니다. 당시 미국은 한반도에서 소련에게 밀리지 않고, 남한의 체제를 신속히 안정시키고 싶어 했습니다. 우리 민족의 억울함, (), 장기적인 발전 등에 관하여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미국의 입장에서는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미군의 입장에서는 오랫동안 미국에서 공부하고 생활한 친미적인 이승만(내지 미국 유학파)이 마음에 들었을 것입니다. 또한 일제강점기 때 여러 요직에서 활동하던 친일파들을 활용하면 정국을 빨리 안정시킬 수 있으리라 판단했을 것입니다. , 미군은 자신들의 입장과 기준에서, 해방 이후 혼란스러운 남한을 최대한 빨리 안정시키려는 방법을 모색하였고, 그 결과 남한에서 친일파들이 계속 득세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마 이러한 와중에 친일파들은 하나의 생존전략을 체득하였는지도 모릅니다. ‘일단 위기와 혼란을 수습하여야 하니 적폐청산은 나중으로 미루자는 분위기를 조성하는 그런 전략 말입니다.

 

해방 이후 전 세계적인 분위기도 위와 같은 위기 조장 전략을 구사하기 좋은 쪽으로 흘렀습니다. 미국과 소련의 대립을 중심으로 하여 동서진영이 대립하는 냉전구도가 형성되었기 때문입니다. 남한의 위정자들은 북한과의 대립관계를 강조하여, 국민들에게 늘 현재를 임시적인 위기상황으로 인식시키려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누군가 정부에 대하여 불만을 가지려고 하면, “너의 불만은 어느 정도 이해해. 하지만 지금 상황이 이렇게 위기에 놓여있는데 어쩌겠니. 위기가 극복되면 그때 가서 다시 생각해보자”, 뭐 대충 이런 식으로 대응을 하였지요. 그런데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위기는 극복되지 않았습니다. 위기론이 사라지지 않고 너무 오래 지속되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사람들은 그것이 불만에 대한 입막음용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가지기 시작했습니다.

 

위와 같은 위기론이 완전한 허구인 것은 아닙니다. 일정 부분 또는 상당 부분 일리는 있습니다. 실제로 1950년에 한국전쟁(6.25)이 발발하였지요. 냉전 또한 실재한 것이구요. 그러나 주객이 전도되어서는 안 되겠지요. 이승만은 북한으로부터의 위협을 절절하게 느껴서 반공을 강조했다기보다는, 반대파를 탄압하기 위한 수단으로 반공을 내세웠습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인물이나 세력이 있는데 마땅히 그들을 공격할 명분이 없으면, 그들이 북한과 연결되어 있다는 누명을 뒤집어씌우고 숙청을 감행했습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조봉암의 경우입니다. 조봉암은 1956년 대통령 선거에서 관권선거 및 부정선거로 인한 엄청난 불이익에도 불구하고 30% 가량의 득표율을 얻어 이승만을 당혹케 하였습니다. 이승만은 1959년 조봉암과 조봉암이 속해 있던 진보당에게 북한과 연결되어 있다는 누명을 씌우고, 사법기관을 이용하여 조봉암을 사형에 처합니다.

 

그런데 이승만 정권은 19604.19 혁명으로 인하여 막을 내리지요. 저는 우리나라에서 4.19 혁명이 일어난 것이 다소 아이러니하다고 생각합니다. 당시 1인당 국민소득은 연간 82불 정도였다고 합니다. 먹고 사는 게 정말 어려운 시기였지요. 오늘날과는 격이 완전히 다른 절대적 빈곤의 시기였습니다. 이승만은 계속 반공 프레임을 내세우며 자신의 권력을 정당화하고 있기도 하였구요. 이러한 와중에 아래로부터의 혁명이 일어나 정권이 막을 내린 것은 실로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날에는 사람들이 민주주의를 당연한 가치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해방이나 6.25 직후 또는 1960년 무렵에는 그렇지 않았을 것입니다. 조선왕조 시대의 관념이 아직 상당히 남아있는 시기였고, 절대적 빈곤 때문에 사람들의 1차적 관심은 경제에 있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전 국민들 사이에서 민주화에 대한 열망이 피어오른 것은 높게 평가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19603.15 부정선거로 인하여 국민들의 이승만 정권에 대한 불만과 민주화에 대한 열망은 극에 달했고, 이로 인하여 촉발된 4.19 혁명으로 인하여 이승만은 하야하게 됩니다.

 

이후 한국의 정치는 민주화를 열망하는 세력과 이를 억압하는 세력의 대립구도로 흐릅니다. 얼핏, 민주화는 선한 것이므로 전자는 옳고 후자는 잘못됐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지만, 꼭 그렇지는 않을 수도 있습니다. 민주화를 억압하는 세력 측에서는 주로 안보경제의 가치를 내세웁니다. 안보와 경제 역시 한 국가가 추구해야 할 중요한 가치입니다. 그런데 안보와 경제를 강조하는 이들은 동시에 국민통합을 강조했습니다. 이들은 국론이 분열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국민 모두가 하나가 되어 힘을 합쳐야 북한의 위협을 막을 수 있고 경제를 발전시킬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꽤 그럴듯한 말이지요.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민주주의는 기본적으로 다양성과 다원성을 존중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합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서로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들 사이의 대화와 타협이 필수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민주주의적인 의사결정 방식은 일사불란함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기도 합니다. 한국의 위정자들은 이러한 점을 이용해 왔습니다. “민주주의가 좋은 것은 맞지. 그런데 당장 눈앞에 있는 안보위기, 경제위기부터 해결해야 할 것 아닌가.” 이렇게 말하면서 국론과 국민의 통합을 강조했습니다. 민주주의를 외치는 이들을 국론을 분열시키는 불온한 세력으로 규정지었습니다.

 

4.19 혁명은 그 자체로 위대함에도 불구하고 좋은 결실로 이어지지는 못합니다. 19608월 내각책임제 형태의 제2공화국(국무총리 장면)이 들어서지만, 얼마 못가 붕괴됩니다. 박정희와 육군사관학교 8기생(대표적으로 김종필)들이 주축이 된 군인들은 19615.16 쿠데타를 일으킵니다. 쿠데타가 성공하여 대통령제로의 복귀 등을 골자로 한 헌법개정이 이루어지고 제3공화국이 시작됩니다.

 

박정희를 비롯한 군인들이 쿠데타를 일으킨 명분은 무엇이었을까요. 당시 발표된 혁명공약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반공을 국시의 제일로 삼고 반공태세를 재정비 강화할 것, 미국을 위시한 자유우방과의 유대를 공고히 할 것, 모든 부패와 구악을 일소하고 청렴한 기풍을 진작시킬 것,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하고 국가자주경제의 재건에 총력을 경주할 것, 국토통일을 위하여 공산주의와 대결할 수 있는 실력을 배양할 것, 양심적인 정치인에게 정권을 이양하고 군은 본연의 임무로 복귀할 것(네이버 지식백과 중 5·16군사정변 부분 참조).

 

당시 군부세력은 그 무렵의 국내 상황을 안보위기, 외교위기, 정치위기, 경제위기를 겪고 있는 총체적 위기 상황으로 규정하였습니다. 이러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하여 쿠데타가 불가피하였음을 역설하였으며, 나아가 이로써 자신들의 권력을 정당화하였습니다(박정희는 사태가 안정되면 정권을 민간에 이양하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고 자신이 정권을 차지했습니다. 자신이 집권하는 시기 내내 위기상황이 계속되고 있다고 판단했던 것일까요).

 

이후 박정희 정권은 안보와 경제를 강조하며 독재정치를 펼칩니다. 국민통합의 필요성을 역설하며 이를 해하는 것을 막는다는 명분으로 민주화세력을 탄압합니다. 물론 경제를 급속히 발전시킨 점 등 박정희 정권의 업적도 있습니다. 아무튼 제3공화국의 박정희 정권은 승승장구하였습니다. 전 세계적인 냉전 분위기 속에서 안보위기를 강조하기도 좋았고, 경제면에서는 실제로 큰 성과를 내기도 하였습니다(물론 이에 대하여는 재벌위주의 성장정책이었고 빈부격차를 유발했다는 등의 합리적인 비판도 있습니다).

 

그러던 와중 박정희 정권에 위기가 찾아옵니다. 1969725일 미국 대통령 닉슨은 아시아에 대한 정책으로 닉슨독트린을 발표합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미국은 앞으로 베트남전쟁과 같은 군사적 개입을 피한다. 미국은 아시아 제국과의 조약상 약속을 지키지만, 강대국의 핵에 의한 위협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내란이나 침략에 대하여 아시아 각국이 스스로 협력하여 그에 대처하여야 할 것이다. 미국은 태평양 국가로서 그 지역에서 중요한 역할을 계속하지만 직접적·군사적인 또는 정치적인 과잉개입은 하지 않으며 자조의 의사를 가진 아시아 제국의 자주적 행동을 측면 지원한다. 아시아 제국에 대한 원조는 경제중심으로 바꾸며 다수국간 방식을 강화하여 미국의 과중한 부담을 피한다. 아시아 제국이 510년의 장래에는 상호안전보장을 위한 군사기구를 만들기를 기대한다(네이버 지식백과 중 닉슨독트린 부분 참조).

 

닉슨독트린이 선포된 원인 중 하나는 ‘68혁명입니다. 19685월 프랑스에서 일어난 68혁명은 그 의미와 파급력이 매우 컸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당시의 언론통제로 인한 결과입니다). 68혁명은 권위주의 등 구태의연한 기존의 사회질서에 대하여 항거하는 운동이었는데, 미국의 베트남 전쟁 참전 문제도 큰 이슈였습니다. 68혁명은 미국으로도 번져서 미국의 젊은이들은 미국의 베트남 전쟁 참전에 반대하는 시위를 크게 일으켰습니다. 미국은 이러한 반대를 무릅쓰고 베트남 전쟁을 강행하였음에도 사실상 전쟁에서 패배하였습니다. 이로 인하여 미국 정부는 체면을 구기고 정치적 입지에도 영향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한 원인이 되어 앞으로 아시아의 문제에 대한 군사적·정치적 개입을 최소화하겠다는 취지의 닉슨독트린을 발표하게 된 것이지요. 닉슨독트린 이후 주한미군 병력이 감축되었고, 박정희는 이에 대하여 불만이었습니다.

 

이후 닉슨은 이른바 핑퐁외교를 통해 중국과의 교류를 시작합니다. 이는 상징적이고 큰 의미를 갖습니다. 이를 통하여 동서냉전의 분위기가 동서화합의 분위기로 전환하게 됩니다. 한편, 박정희는 개인적으로 닉슨과 악연이 있기도 하였습니다. 닉슨이 대통령에 당선되기 전, 대통령 선거와 주지사 선거에서 낙선하고 한국에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당시 박정희는 닉슨을 별 볼일 없는 사람으로 취급하고 냉대했다고 합니다. 이후 닉슨이 대통령에 당선되고 나서 박정희가 닉슨을 만나러 미국을 방문하였을 때 닉슨은 별장에서 친구들과 함께 있으면서 의자에 앉은 채로 박정희를 맞이하고 식사 대접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 초반까지 박정희 정권은 국제적, 외교적으로 위기를 맞이합니다. 전 세계적인 화해 분위기가 조성됨에 따라 안보위기를 강조하는 정책을 강행할 명분이 약해졌고, 미국에 의존하고 있던 외교정책에도 타격을 받았습니다. 한편, 박정희는 국내 정치에 있어서도 위기를 맞이합니다. 1971년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 야당인 신민당의 후보로 출마한 김대중 후보는 관권선거와 부정선거로 인한 불이익을 감수하고도 46%의 높은 득표율을 얻었습니다(이 무렵부터 이른바 김대중 죽이기가 시작되기도 합니다). 국민들의 민주화에 대한 열망이 높아진 결과였습니다.

 

박정희는 국내외적으로 자신에게 불리하게 돌아가는 상황을 그대로 두지 않았습니다. 197210월 비상계엄을 선포하였습니다. 헌법의 효력을 일부 정지시키고 국회도 해산하였습니다. 이후 유신헌법이 국민투표로 확정되어 유신체제(4공화국)가 시작됩니다. 유신헌법으로 대통령의 임기는 6년으로 늘어났고, 대통령 출마 횟수 제한도 없어져 사실상 박정희의 영구집권이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대통령이 법관을 임명하고 국회의원의 1/3을 추천하게 하여 삼권분립이 형해화되었습니다. 대통령의 판단으로 법의 효력을 정지시킬 수 있는 긴급조치권까지 도입되어, 비정상적으로 대통령의 권한만 강화된 체제가 탄생하였습니다.

 

박정희가 유신을 선포한 주요 명분은 안보위기였습니다. 닉슨독트린 이후 주한미군 병력이 감축된 것 등을 두고 박정희 정권은 남한이 군사적으로 큰 위기에 놓여있음을 피력하였습니다. 그런데 유신이 선포되기 불과 3개월 전인 19727월에 7.4 남북공동성명이 있었습니다. 이는 남과 북이 자주적, 평화적으로 통일하고 사상과 이념의 차이를 넘어 민족적 대단결을 도모한다는 취지의 성명이었습니다. 그 직후 안보위기를 내세우며 유신을 선포한 것은 모순적입니다. , 박정희 정권은 안보위기를 절절하게 실감하여 유신을 선포하였다기보다는, 정권 유지를 위한 수단으로 유신을 선포하였다고 보는 것이 더 설득력이 있습니다. 안보위기는 정권을 유지하기 위한 명분에 불과했던 것이지요.

 

중간정리를 하여 보면, 해방 직후의 정국도 그렇고, 19615.16 쿠데타 때도 그렇고, 1972년 유신선포 때도 그렇고, 위정자들은 눈앞의 위태로운 상황을 안정시켜야 한다는 명분을 내세웠습니다. 위기 상황을 일부러 조장해 가면서까지 말이지요. 한국은 이상할 정도로 민주화에 대한 열망이 뜨거웠습니다(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위정자들은 안보위기, 경제위기 등 극복해야할 위기들과 국민통합을 내세우고 강조하며, 민주화운동 세력을 이에 반한다고 규정하며 탄압했습니다.

 

1970년대에는 전태일 분신자살을 기점으로 노동운동이 확산되었습니다. 유신으로 인한 삼엄한 사회분위기 속에서도 민주화운동이 계속 이어졌구요. 1978년 박정희는 통일주체국민회의의 이른바 체육관 선거를 통해 제9대 대통령이 됩니다. 다섯 번 대통령이 된 것이지요. 그 무렵 야당과 재야의 정치인들은 물론 일반 시민들까지도 박정희의 장기독재정권에 대하여 더 큰 불만을 표출하게 됩니다. 그 해 1212일 치러진 제10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야당인 신민당이 32.8의 득표율을 올려 여당인 공화당의 득표율 31.7를 뛰어넘는 결과가 나오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던 와중 1979‘YH 사건이 일어납니다. 당시 가발 생산업체였던 YH무역은 70년대 중반부터 수출둔화와 업주의 자금유용 및 무리한 기업확장 등으로 심각한 경영난에 빠져든 데다 75년 노조가 결성되어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하자 무책임하게 폐업을 합니다. YH 여성 노동자들은 이러한 폐업 조치에 대항하여 폐업 철회와 회사 정상화, 근로자 생존권 보장 등을 요구하며 투쟁을 전개하였습니다. 그러나 별 성과가 없자, 89일 여성 노동자 170여 명은 야당인 신민당의 당사로 들어가 이곳을 마지막 투쟁의 장으로 삼았습니다. 이에 박정희 정권은 농성자들을 해체시키기 위해 811일 경찰 1000여 명을 신민당사로 투입하여 강제 진압에 나섭니다. 그 과정에서 국회의원 및 기자가 폭행당하고 100여 명의 부상자가 발생하였으며, 여성 노동자 중 한 명이던 김경숙 양이 사망함으로써 국내외적으로 큰 정치적 쟁점으로 불거지게 되었습니다(네이버 지식백과 중 YH 사건 부분 참조).

 

YH 사건으로 인하여 야당인 신민당은 박정희 정권으로부터 더 큰 미움을 받게 되었습니다. 신민당이 정권에 대항한 YH 여성 노동자들을 감싸주었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얼마 후 당시 신민당의 총재였던 김영삼은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미국이 박정희 정권에 대한 지지를 철회해야 한다는 이야기까지 합니다. 이로 인하여 박정희는 크게 노했고, 김영삼을 국회의원직에서 제명되도록 만듭니다.

 

이후 부마항쟁이 일어나는데요. 광주학살에 대한 이야기를 해봐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사실은 부마항쟁 이야기부터 시작하려고 했습니다. 부마항쟁은 10.26 사건(박정희 암살 사건)을 촉발하였고, 이로 인하여 나아가 광주학살까지 일어나게 되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부마항쟁의 원인은 무엇일까 까지 생각하게 되었고, 그 생각은 결국 해방 직후의 정국에 대한 생각으로까지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해방 직후의 정국에서부터 광주학살에 이르기까지, 그 줄기를 관통하는 하나의 흐름이 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리하여 결국 해방과 친일파 이야기부터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안물안궁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 길고 지루한 글을 여기까지 읽으신 분은 거의 없기도 하겠지요. 아무튼 뭔가 해명 같은 걸 하고 싶어 드리는 말씀입니다.

 

1979년 무렵은 제2차 오일쇼크로 인하여 전 세계적으로 경기가 좋지 않았고 우리나라의 경제 사정 역시 좋지 않았습니다. 이와 더불어 정치적 탄압까지 거세지자 시민들의 불만은 더욱 증폭되었습니다. 그러던 와중에 위에서 본 것과 같이 김영삼이 국회의원직에서 제명되자, 197910월 김영삼의 정치적 근거지인 부산에서 학생들과 시민들은 대규모로 반정부 시위를 일으킵니다. 이 시위는 마산과 창원으로까지 확대됩니다. 부마항쟁이 일어난 것이지요. 박정희 정권은 공수부대까지 동원하여 시위를 진압합니다. 당시 중앙정보부장이던 김재규는 직접 부산 지역을 시찰하고 오기도 하였습니다. 이때 김재규는 박정희 장기독재정권의 폐해를 더욱 크게 실감했다고 합니다.

 

부마항쟁을 두고 당시 대통령 경호실장이던 차지철은 박정희에게 각하, 캄보디아에서도 3백만 명을 죽였는데 우리가 1, 2백만 명 정도의 시위대를 탱크로 밀어 죽이는 게 대수입니까"라는 말을 했다고 합니다. 김재규는 정말로 박정희 정권이 부산이나 마산 지역에서 대규모 학살을 감행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과 두려움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박정희의 오랜 독재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을 지속적으로 해오기도 했습니다. 이에 김재규는 국가와 민족을 위하는 마음으로 19791026일 박정희와 차지철을 사살합니다.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았습니다. 이른바 10.26 사태가 일어난 것이지요.

 

박정희의 죽음 이후 야당 정치인과 시민들은 민주화 시대의 도래를 기대했지만 결과는 그렇게 되지 못했습니다.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 세력은 19791212일 군사반란(12.12 사태)을 일으킵니다. 그 무렵 전두환은 계급이 소장임에도 불구하고 군부 내에서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처세술에 능했던 전두환은 유신시절 박정희의 두터운 신임을 얻고 있었고, 군부 내 사조직인 하나회를 통해 군부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전두환이 12.12 쿠데타를 일으킨 이유는 군부 내에서 자신을 견제할 만한 세력을 제압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당시 전두환은 육군참모총장이자 계엄사령관이던 정승화를 강제연행하였습니다. 형식적인 명목은 정승화에게 박정희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묻는 것이었지만, 실질적인 이유는 라이벌이 될 수도 있는 세력을 제거하여 군부를 장악하려는 것이었습니다. 나아가 정권을 장악하려는 의도도 있었겠지요. 그런데 당시 시민들은 언론통제로 인하여 12.12 사태와 전두환을 비롯한 신군부 세력의 행보를 제대로 알지 못했습니다.

 

박정희의 죽음 이후 한국 사회는 민주화에 대한 열망과 기대가 크게 고조되는 분위기였습니다. 박정희의 죽음(19791026) 이후부터 광주학살 이전(1980517)까지의 몇 달 간을 서울의 봄이라고 일컫습니다. 민주화에 대한 기대가 그 이전의 어느 때보다도 높아졌고 실제로 민주화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난 시기이기 때문입니다. 그 무렵 대학들에서는 학내 언론자유, 교련철폐, 어용교수 퇴진 등을 외치는 시위들이 활발하게 일어났고, 청계피복 노동자투쟁, 사북탄광 노동항쟁 등 노동운동도 다수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당시 민주화세력은 정권을 창출할 만큼의 결집력을 가지지 못했습니다. 야권의 걸출한 지도자였던 김영삼과 김대중은 서로 대립하며 독자적인 노선을 걸었습니다. 서로 일치단결하여도 신군부에 비하면 힘이 미약한데, 야권의 대표주자라고 할 수 있는 두 인물이 서로 대립하였으니, 사실상 민주화세력이 정권을 창출하기는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다만, 김영삼과 김대중의 대립을 그들의 책임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박정희 정권은 의도적으로 양김의 대립을 조장하였고, 전두환도 전략적으로 이를 의도하였습니다). 달리 양김을 대체할만한 인물이나 세력이 있는 형편도 아니었습니다.

 

1980414일 당시 보안사령관이었던 전두환이 중앙정보부장 서리에 취임한다는 발표가 있었습니다. 그 무렵부터 일부 시민들과 대학생들은 사태가 무언가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음을 감지했습니다. 5월 초부터 전국의 대학생들은 비상계엄 해제를 요구하는 정치투쟁을 시작합니다(10.26 직후 선포된 비상계엄이 장기간 해제되지 않고 계속 유지되고 있었습니다).

 

한편, 그 무렵 전두환은 정권을 차지하기 위한 전략을 치밀하게 구성하고 있었습니다. 전두환은 워싱턴포스트와 뉴욕타임스에 한국의 신군부를 홍보하는 광고를 싣고, 미국의 정치인들에게 정치자금을 뿌렸습니다. 추후 미국으로부터 정치적인 인정을 받기 위한 물밑작업이었던 것이지요. 또한 전두환은 치밀하게 언론을 장악합니다(이를 이른바 ‘K-공작이라고 하는데, KKing을 지칭합니다. 전두환을 왕, 즉 대통령으로 만들려는 계획이었습니다). 보안사령부에 언론대책반을 구성하고 이를 통해 시중의 언론을 회유 또는 압박하여 여론을 조작합니다. 실제로 박정희의 죽음 이후에 사회에 어느 정도의 혼란이 있었던 것은 맞습니다. 전두환과 신군부는 이를 심하게 과장하고 왜곡까지 하여 당시의 사회가 매우 혼란스럽다는 여론을 조성합니다. ‘민주화보다는 일단 사회의 안정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인식을 국민들에게 심으려는 것이었지요. 나아가 그 안정을 위해서는 자신과 신군부세력이 정권을 잡아야 한다는 분위기를 만들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이는 성공했습니다.

 

당시 전두환이 대미전략과 언론플레이에 총력을 기울인 이유는 무엇일까요. 자신이 정권을 잡기 위한 명분을 만들기 위함이었습니다. 한국은 이미 19615.16 쿠데타를 경험했습니다. 5.16은 국가와 사회의 안정이 시급하다는 명목을 내세운 군부세력의 쿠데타였습니다. 당시 박정희를 비롯한 군인들은 양심적인 정치인에게 정권을 이양하고 군은 본연의 임무로 복귀할 것을 공약해 놓고 결국 자신들이 권력을 차지했습니다. 그리고 장기독재까지 한 것이지요. 전두환은 자칫하면 국민들로부터 5.16을 되풀이한다는 눈초리를 받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유신이 끝난 줄 알았는데 또 비슷한 상황과 시기가 도래한다고 하면 시민들은 이를 반기지 않겠지요. 전두환은 자신에게 이러한 이미지가 씌워지는 것을 막고, 대내외적으로 자신이 정권을 잡는 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대미전략과 언론플레이에 사력을 다한 것입니다.

 

이렇게 치밀하게 정권을 차지하기 위한 전략을 세우고 실행해 나가던 전두환 세력은 서울의 봄시기에 활발하게 일어나던 여러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을 그대로 둘 수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전두환 세력의 군사적인 움직임을 보면, 198034~6일 수도경비사령부는 '1차 충정회의'에서 군의 투입을 요하는 사태가 발생할 경우 강경한 응징조치를 하겠다는 결의를 하였습니다(‘충정부대는 수방사 예하사단과 특전사 1·3·7·9여단, 수도권의 17·20·26·30사단 등을 지칭하는 것으로, 이들 부대는 신군부에 대항하는 세력을 진압하기 위한 작전에 투입되었습니다). 위 결의에 따라 충정부대는 시위진압을 위해 실시하는 공세적 진압 훈련인 충정훈련을 강도 높게 실시하였습니다(위키백과 중 5.18 광주 민주화 운동 부분 참조).

 

광주학살이 일어나기 직전의 사회 분위기를 조금 살펴보겠습니다. 광주학살이 일어나기 한 달 전인 19804사북사태’(사북탄광 노동항쟁)가 일어납니다. 사북사태는 198042124일까지 국내 최대 민영 탄광인 동원탄좌 사북영업소 광원과 가족 등 6000여 명이 어용노조와 열악한 근로환경에 항거하고 파업한 사건을 말합니다. 사태의 직접적 발단은 10여 년 동안 회사의 편에 서서 어용노조 위원장으로 행세하던 이재기가 당시 전국광산노련의 임금인상률 42.75%를 무시하고 회사와 담합, 415일 일방적으로 20% 인상을 결정한 데서 비롯되었습니다. 사회 전반의 민주화 열기로 고조된 노동자들은 즉시 위원장 사퇴, 임금인상등을 요구하며 농성을 벌였고, 이 과정에서 노동자 1명이 경찰차에 깔려 중상을 입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수천 명의 노동자들은 이에 항의하며 경찰에 대항하였고, 불만의 표적이었던 어용노조간부의 집을 습격하는 등 다소 과격한 행동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이후 노동자들과 경찰이 무력충돌을 하고, 사북 일대가 행정마비에 빠지기도 하였으나, 노동자들의 자율적인 통제로 단 한 건의 치안사고도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노동자들과 경찰은 424일 사태 종식에 합의하였으나, 이를 광부난동사건으로 규정한 계엄사령부 산하 합동수사단은 위 합의를 깨고 주모자 등 81명을 폭도로 몰아 계엄포고령법 위반 등의 혐의로 구속했으며, 이원갑 등 7명은 실형을 선고받고 21명은 집행유예로 석방되었습니다(네이버 지식백과 중 사북항쟁 부분 참조).

 

, 전두환 세력은 경찰이 이미 노동자들과 사태 종식을 합의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노동자들에게 본때를 보이기 위해 이들을 구속하고 형사처벌한 것입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노동자와 그 가족들에게 혹독한 고문이 가해졌습니다. 이원갑은 다음과 같은 진술을 하였습니다. “정선경찰서에서 20여 일은 아비규환의 연속이었다. 이곳저곳에서 비명과 절규가 터지는 상황에서 우리는 지옥이 따로 없다는 것을 절감했다. 우리를 취조하고 고문한 수사관들은 인간의 탈을 쓴 악마였다. 작업복을 입은 채 현장에서 붙잡혀온 광부들에게 장화를 벗긴 뒤, 개 패듯 때리고 고문을 가해 개거품을 물고 기절한 것을 보는 것 자체가 악몽이었다. 힘없고 배운 것 없는 광부들은 파리목숨이나 진배없다는 것을 절실히 깨달았다. 광부들의 죽음은 개죽음이고 경찰관의 죽음은 차원이 현저히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당시 광부는 두더지였을 뿐이다”(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 1980년대편 중에서). 이러한 가혹한 고문의 결과 10여 명이 그 후유증으로 사망하기까지 하였습니다.

 

한편, 학생운동은 각 대학별로 산발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는데, 19805월 초부터 대학들의 연대가 추진됩니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계엄이 지속되고 전두환이 중앙정보부장 서리에 취임하는 등 사태가 무언가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음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513일 대학생들은 학교를 벗어나 거리로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514일에는 서울에서 7만여 명의 대학생들이 도심으로 나왔고, 지방에서도 11개 대학 수만 여 학생들의 가두시위가 있었습니다. 신군부는 이에 대응하여 소요 진압본부를 개설하여 진압군 투입지시를 내렸습니다(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 1980년대편 참조).

 

다음날인 15일에는 서울의 35개 대학과 지방의 24개 대학에서 나온 학생들 수만 명이 전국 주요 도시의 거리를 메웠습니다. 서울에서만 710만 명의 학생들이 서울역 광장으로 모여들었습니다. 이들은 스크럼을 짜고 광화문으로 진출을 시도하였습니다. 오후부터 밤늦게까지 이어진 시위 과정에서 많은 학생들이 연행되었고, 부상자들도 속출하였습니다. 이때 이미 광화문 일대에는 계엄군의 탱크가 진주해 있었습니다. 학생들에게도 서울 곳곳에 군인들을 실은 트럭과 장갑차가 집결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학생들 사이에 곧 군대가 치고 들어올 것이라는 소문이 돌기 시작하였습니다. 또한 시위가 절정에 달한 저녁 8시 경 신현확 국무총리가 연말까지 개헌안 확정, 내년 상반기까지 양대 선거 실시라는 민주화 일정을 발표하며 학생 시위대의 해산을 종용하였습니다. 결국 시위를 이끌던 학생운동 지도부는 일단 여기서 시위를 멈추고 학교로 돌아가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이를 흔히 서울역 회군이라고 부릅니다. ‘서울역 회군뒤인 516일 저녁부터 17일 오후까지 전국 55개 대학 학생 대표 95명이 이화여대에 모여 1회 전국 대학 총학생회장단회의를 열었습니다. 이들은 ‘522일까지 비상계엄해제’, ‘연내 정권이양을 위한 정치일정의 조속한 천명등을 요구하고, 이러한 요구들이 관철되지 않을 때는 행동을 취하기로 결의하였습니다(네이버 지식백과 중 오일오서울역시위 부분 참조).

 

전국의 대학생들이 위와 같이 움직이던 와중, 510일부터 2군사령부는 광주, 대전 등에 제7공수여단을 배치하는 방안을 검토했습니다. 514일부터 2군사령부 예하의 제31사단은 광주 지역의 주요 지점을 점거하기 시작했으며, 515일 제7공수여단은 광주 또는 대전으로 이동할 준비를 마쳤습니다(위키백과 중 5.18 광주 민주화 운동 부분 참조). , 전두환 세력은 이미 학살을 위한 만반의 준비를 갖춰놓고 있었던 것이지요.

 

10.26 이후 일련의 과정들을 보면, 전두환은 박정희의 자리를 이어받기 위해 전방위적으로 치밀한 준비와 공작을 했습니다(저는 전두환 정권이 유신정권의 연장이라고 생각합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12.12 쿠데타를 일으켜 군부를 장악하였습니다. 미국 정치계에 로비를 하는 등 대미전략을 구사하였고, 자신에게 유리한 여론을 조성하기 위해 언론을 장악하였습니다. 반대파 및 적대세력에 대한 탄압에도 주력합니다. 사북항쟁 등 노동운동에 대하여 지나치게 혹독한 진압과 보복을 가했고, 학생운동에 대하여는 학생들을 탱크로 깔아뭉개는 것도 서슴지 않을 태도를 보였습니다. 충정훈련을 실시하는 등 시민들을 무력으로 진압할 만반의 준비까지 해놓았습니다.

 

한편, 전두환은 야당의 유력정치가인 김대중을 탄압합니다. 당시에는 김종필, 김영삼, 김대중, 이른바 삼김이 유력한 정치인으로 떠올라 있었습니다. 전두환은 그중 유독 김대중만 심하게 탄압합니다. 이는 유신정권의 김대중 죽이기의 연장이기도 하고, 삼김(특히 양김인 김영삼, 김대중)을 단합하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 때문이기도 하였습니다. 김대중이 가장 눈에 거슬리는 존재였던 것도 그 이유였겠지요. 전두환 세력은 1980517일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정치인들의 활동을 금지시켰으며, 김대중을 내란음모 혐의로 긴급체포했습니다(김영삼에 대하여는 집 앞에 헌병들을 배치시켜 집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하는 정도의 조치를 취했습니다). 정권을 차지하기 위한 본격적인 행동에 돌입한 것이지요.

 

비상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된 이후 삼엄한 분위기 속에서 전국은 조용했습니다. 그러나 광주에서는 김대중의 체포에 대하여 격분한 학생들이 시위를 일으켰습니다. 어쩌면 전두환 세력은 이를 의도했을지도 모릅니다. 비상계엄 확대와 동시에 김대중을 체포하면 김대중의 정치적 근거지인 호남지역에서만 시위가 일어날 것을 예상했고, 그때 호남인들을 무차별적으로 탄압할 것을 사전에 치밀하게 계획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는 정말 무서운 음모입니다.

 

이후 벌어진 사태의 개요는 다음과 같습니다. 51816시 이후 광주 시내에 투입된 공수부대원이 운동권 대학생뿐만 아니라 시위에 참여하지 않은 무고한 시민까지 닥치는 대로 살상·폭행하는 것을 목격한 광주시민들은 두려움을 넘어 분노를 느꼈고, 그 결과 중장년층뿐만 아니라 10대 청소년까지 거리로 나서 시위에 참여하면서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은 걷잡을 수 없이 번졌습니다. 광주 시민들의 격렬한 저항에 부딪힌 계엄군은 52113시경 전남대학교와 전남도청 앞에서 집단 발포를 한 후 철수했습니다. 이 날 저녁 광주시 외곽으로 철수한 계엄군은 광주 외곽도로 봉쇄작전을 펼쳤으며, 이 과정에서 차량 통행자나 지역 주민들을 공격하거나 학살하였습니다. 5270시를 기해 계엄군은 상무충정작전을 실시해 무력으로 전남도청을 점령했습니다(위키백과 중 5.18 광주 민주화 운동 부분 참조).

 

학교 앞 서점에서 문제집을 사려고 혼자 집을 나선 지난 일요일이었다. 갑자기 거리에 들어찬 무장 군인들이 어쩐지 무서워 너는 천변길로 내려가 걸었다. 신혼부부로 보이는, 성경과 찬송가 책을 손에 든 양복 입은 남자와 감색 원피스 차림의 여자가 맞은편에서 걸어오고 있었다. 날카로운 고함 소리가 몇차례 위쪽 도로에서 들리더니, 총을 메고 곤봉을 쥔 군인 셋이 언덕빼기를 타고 내려와 그 젊은 부부를 둘러쌌다. 누군가를 뒤쫓다 잘못 내려온 것 같았다.

무슨 일입니까? 지금 저흰 교회에……

양복 입은 남자의 말이 채 끝나기 전에, 사람의 팔이 어떤 것인지 너는 보았다. 사람의 손, 사람의 허리, 사람의 다리가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 보았다. 살려주시오. 헐떡이며 남자가 외쳤다. 경련하던 남자의 발이 잠잠해질 때까지 그들은 멈추지 않고 곤봉을 내리쳤다. 곁에서 쉬지 않고 비명을 지르다 머리채를 잡힌 여자가 어떻게 되었는지 너는 모른다. 덜덜 턱을 떨며 천변 언덕을 기어올라 거리로, 더 낯선 광경이 펼쳐지고 있는 거리로 들어섰기 때문이다.”

군인들의 명령대로 이층 복도에 머리를 박고 있던 우리들이 도청 마당으로 끌려내려간 건 동틀 무렵이었습니다. 뒤로 손이 묶인 채 마당 가장자리에 일렬로 무릎 꿇고 앉은 우리들에게 한 장교가 다가왔습니다. 그는 흥분해 있었습니다. 한사람씩 군화로 등을 밟아 흙바닥에 머리를 박게 하며 욕설을 퍼부었습니다. 씨팔, 내가 월남 갔다 온 사람이야. 내 손으로 죽인 베트콩 새끼들이 서른 명도 넘는다, 더러운 빨갱이 새끼들. 그때 김진수는 내 옆에 있었습니다. 장교가 김진수의 등을 밟자, 하필 자갈에 찧은 이마에서 피가 흘렀습니다.

다섯명의 어린 학생들이 이층에서 두 손을 들고 내려온 것은 그때였습니다. 계엄군이 대낮같이 조명탄을 밝히며 기관총을 난사하기 시작했을 때 내가 소회의실 캐비닛에 숨으라고 명령했던 네 명의 고등학생과, 소파에서 김진수와 짧은 실랑이를 벌였던 중학생이었습니다. 더 이상 총소리가 들리지 않자 그들은 김진수의 말대로 무기를 버리고 항복하러 내려온 것이었습니다.

저 새끼들 봐라, 김진수의 등을 밟고 있던 장교가 여전히 흥분한 채 소리쳤습니다. 씨팔 빨갱이들, 항복이다 이거냐? 목숨은 아깝다 이거냐? 한발을 여전히 김진수의 등에 올린 채 그는 M16을 들어 조준했습니다. 망설이지 않고 학생들에게 총을 갈겼습니다. 나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봤습니다. 씨팔, 존나 영화 같지 않냐. 치열이 고른 이를 드러내며 그가 부하를 향해 말했습니다.”

(한강, ‘소년이 온다중에서)

 

이것은 소설에 나오는 이야기이지만, 당시 실제로 일어났던 일이기도 했습니다.

 

어떤 경우는 터미널 뒤편의 막다른 골목까지 달아난 학생이 드디어 잡히게 되자 자지러지게 무릎을 꿇으며 살려 달라고 연신 빌었다. 대문에 나와 내려다보던 할아버지가 너무도 애처로워 몸으로 가리면서 봐달라고 사정하자, 공수대원은 비켜 이 새끼!’ 하면서 할아버지를 곤봉으로 내리쳤다. 할아버지는 피를 뒤집어쓰며 고꾸라졌고 쫓겼던 학생은 돌을 집어 들었으나 공수대원은 가차없이 곤봉으로 후려친 뒤에 대검으로 등을 쑤시고는 다리를 잡아 질질 끌고 길거리로 나갔다.”

공수 놈들이 여고생을 붙잡고 대검으로 교복 상의를 찢으면서 희롱하고 있었다. 그 광경을 보고 있던 60살이 넘어 보이는 할머니 한 분이 아이고! 내 새끼를 왜들 이러요?’ 하면서 만류하자 공수놈들은 이 씨팔년은 뭐냐? 너도 죽고 싶어?’ 하면서 군화발로 할머니의 배와 다리를 걷어차 할머니가 쓰러지자 다리와 얼굴을 군화발로 뭉개버렸다. 그리고 그들은 여학생의 교복 상의를 대검으로 찢고 여학생의 유방을 칼로 그어 버렸다. 여학생의 가슴에서는 선혈이 가슴 아래로 주르르 흘러내렸다.”

로타리 부근 전투에서 머리가 으깨지고 팔이 부러져 온통 피범벅이 된 부상자를 급히 병원으로 이송중이던 택시기사에게 공수대원이 부상자를 내려놓으라고 명령했다. 기사는 안타깝게 당신이 보다시피 지금 곧 죽어가는 사람을 병원으로 운반해야 되지 않겠느냐 라고 호소하자 그 공수대원은 차의 유리창을 부수고 운전기사를 끌어내려 대검으로 무참하게 배를 찔러 살해했다

못자리에서 피사리하는 농부에게 총을 쏘아 중상을 입히고 저수지에서 목욕하는 중학교 1학년짜리를 오리 사냥하듯 쏘아죽였으며, 배수관 밑으로 숨어들어가는 여인에게 6발이나 총을 쏘아 죽이고, 도망치다 벗겨진 고무신을 줍는 국민학교 4학년짜리한테 10여 발이나 총을 갈겨 몸뚱이를 걸레로 만들었다. 칠면조 우리에 총을 쏘아 2백여 마리나 죽였으며 젖소를 쏘아 죽이기도 했다. 이것이 송암동 한 부락에서만 있었던 살육이었다. 그것도 전투중에 전투의 흥분으로 한 것이 아니다. 22일 시외곽으로 퇴각해서 이틀 동안 쉰 다음 24일 부대이동을 하면서 한 짓이다.”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 1980년대편 중에서)

 

6.25와 베트남 전쟁 때도 이토록 참혹한 살육은 없었다고 합니다. 그야말로 참혹한 대학살이었습니다. 광주에 투입된 공수부대원들은 동물을 사냥하듯이 사람들을 해치고 살육했습니다. 1980531일 계엄사령부는 광주 사태로 민간인 144, 군인 22, 경찰 4명 등 모두 170명이 사망했으며, 민간인 127, 군인 109, 경찰 144명 등 380명이 다쳤다고 공식 발표하였으나, 이 발표를 그대로 믿는 광주시민은 아무도 없었습니다(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 1980년대편 참조). 광주학살로 인하여 무수히 많은 시민들이 죽고 다쳤습니다. 그 참상은 어떠한 말로도 제대로 표현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토록 참혹한 학살이 일어난 이유는 무엇일까요. 전두환 세력이 아무리 정권차지를 위한 목적에서 과격한 시위진압을 의도하였다고 하더라도 광주학살은 그 정도가 너무 심합니다. 먼저, 광주학살을 자행한 공수부대원들은 충정훈련과정에서 철저한 반공교육을 받았습니다. 호남 김대중 북한이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을 세뇌당하고, 그들에 대한 폭력은 문제되지 않고, 오히려 악을 척결하는 선한 일이라는 생각까지 주입받았을 가능성이 큽니다. 실제로 공수부대원들은 광주시민들을 살상하면서 빨갱이 새끼들”, “김대중이가 밥 먹여주냐는 등의 말을 하였는데, 이를 통해 신군부가 충정훈련 과정에서 어떤 사상교육을 하였는지를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광주학살에 투입된 병력 중에는 월남전에 참전했거나, 앞에서 본 사북항쟁 등 노동운동 진압에 참여했던 경험이 있는 인원이 많았습니다. , 잔혹한 폭력에 대한 경험이 있는 부대원들이 많았습니다. 신군부가 광주학살 직전의 3일 정도의 기간에 공수부대원들에게 밥을 제대로 먹이지 않았다는 말도 있는데, 그렇게 한 이유는 공수부대원들의 폭력성을 높이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전두환은 광주학살 기간 중에 공수부대에 직접 포상금을 보내기도 합니다. 생각하기 싫지만, 살상행위를 장려하기 위함이었겠지요. , 전두환 세력은 정말 무섭도록 치밀하게 폭력과 살상을 조장했습니다.

 

광주학살의 본질을 이해함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이것이 시위에 대한 진압과정에서 있던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론 초반에는 계엄해제등을 외치는 대학생들의 시위가 있긴 했지만, 광주시민들은 이러한 대학생들의 시위의 연장선에서 공수부대원들에 대항하고 시민군을 편성한 것은 아닙니다. 공수부대원들은 시위를 하는 대학생들에 대하여 필요 이상으로 과격한 폭력과 살상을 가했고, 시위와 무관한 일반 시민들에게까지도 무력을 행사하고 살육을 자행했습니다. , 공수부대원들의 이유 없는 학살이 먼저입니다(그들이 생각하는 이유가 있었을 수는 있겠지요). 공수부대원들은 아무런 이유도 없이(적어도 합리적인 이유도 없이) 인간사냥하듯이 광주시민들을 살육했습니다. 공수부대원들은 인간을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은 것입니다. 이에 광주시민들은 인간의 존엄을 위해 대항합니다. , 광주시민들은 광란에 휩싸여 자신들의 가족과 이웃을 살육하는 공수부대원들에게 대항하여, 최소한의 인간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시민군을 편성해 맞서 싸운 것입니다. 광주학살의 본질은 시위의 진압이 아닙니다. 이유 없는 학살에 대한 광주시민들의 저항입니다.

 

광주의 비극은 이걸로 끝이 아니었습니다. 신군부의 철저한 언론통제로 인하여 광주학살은 외부에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알려지지 않은 정도에서 끝난 것이 아니라, 호남을 차별하는 지역감정으로 인하여 광주시민들과 호남인들은 2차적인 피해까지 입게 됩니다. 강준만은 한국현대사산책 1980년대편 머리말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광주학살은 오직 전두환을 비롯한 신군부 일당만의 만행이었던가? 광주학살은 호남차별이라는, 많은 한국인들이 갖고 있는 야만적 정서라는 토양이 없었다면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는 주장도 있지만, 이에 대해선 의견이 분분하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다수 한국인은 광주학살의 진상을 모른 채 또는 알아보겠다는 최소한의 관심과 노력도 기울이지 않은 채 광주의 아픔과 상처에 공감하기는커녕, 광주의 상처가 너무 아프다고 울부짖는 호남인들을 박대하고 모멸하기까지 했다는 것이다.”

 

얼마 후인 198074일 계엄사령부는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을 발표합니다. 서울에서 대학생들이 일으킨 시위(5.15 서울역 시위)와 광주 민주화 운동의 배후에 김대중이 있었다는 명목으로 김대중과 민주화 운동가들을 군사재판에 회부한 사건입니다. 물론 이는 조작된 것이었습니다. 전두환 세력은 광주항쟁을, 북한과 연결된 김대중이 국가전복을 목적으로 호남인들을 조종하여 일으킨 폭동으로 규정하려 하였던 것이지요. 이 사건에서 김대중은 사형을 선고받습니다(이후 미국을 비롯한 세계 각국의 항의로 무기징역형, 이어서 징역 20년형으로 감형되었다가, 198212월 형집행정지로 출소하여 미국으로 망명합니다). 이후 전두환은 827일 통일주체국민회의의 간선(이른바 체육관 선거)으로 제11대 대통령에 선출됩니다. 그 다음 개헌을 추진하여 1023일 국민 투표를 거쳐 1027일 제8차 개정헌법이 공포됩니다. 이듬해인 19811월 전두환은 민주정의당을 창당하여 총재가 되고, 2월에는 개정된 헌법에 따라 선거인단의 간선을 거쳐 제12대 대통령에 당선이 됩니다. 이로써 제5공화국이 시작하게 됩니다.

 

전두환 정권 기간 내내 광주학살은 제대로 알려지지 못합니다. 전두환 정권은 철저하게 언론을 통제했습니다. 또한 국민들의 관심을 딴 곳으로 돌렸습니다. 86아시안게임과 88올림픽을 유치하고 프로야구를 출범시켰습니다. 특히 올림픽을 위해 국민들이 일치단결해야 함을 강조했습니다. 전두환 정권 때는 경제적인 호황도 있었습니다. 이른바 ‘3저현상’(저달러, 저유가, 저금리)에 의하여 유례없는 호황을 누렸습니다. 이 때문에 전두환 정권을 높게 평가하는 이들도 있지만, 과연 이것을 전두환 정권의 업적으로 볼 수 있을지는 의문입니다.

 

1980년대 중반부터 다시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민들의 움직임이 커집니다. 시민들은 대통령 직선제로의 개헌을 요구합니다. 시민들의 목소리가 커지자 전두환 정권은 개헌에 대한 논의를 시작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그런데 1987413일 전두환은 갑자기 호헌 선언을 합니다. 헌법을 개정하지 않겠다는 선언이지요. 19876, 시민들은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서울대학교 학생 박종철이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조사를 받던 중 경찰의 고문으로 사망한 사건)과 호헌 선언에 항의하며 거리로 쏟아져 나옵니다. 연세대학교 정문 앞에서 시위를 벌이던 이한열이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쓰러지는 사건으로 학생들과 시민들은 더욱 분노하게 됩니다. 시민들의 시위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지자 전두환은 시위의 진압을 위해 군부대의 투입을 검토합니다. 그러나 결국 시위의 규모가 너무 커서 군부대를 동원하더라도 시위를 진압하기 어렵다는 판단에 이릅니다. 또한 미국 정부가 전두환 정권에게 군부대를 투입하지 말라는 압력을 가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한편 광주학살에 관하여는, 신군부의 군부대 투입을 미국 측이 묵인해 주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결국 전두환 정권은 6.29 민주화선언을 발표하게 됩니다. 국민들에게 대통령 직선제로의 개헌과 민주화에 관한 조치들을 이행하겠다는 약속을 한 것입니다. 이후 개헌안이 마련되어 19871012일 국회에서 의결되었고 1027일 국민투표로 확정되었으며, 1029일 새로운 헌법이 공포되었습니다. 이것이 지금까지 시행되고 있는 우리 헌법입니다. 같은 해 1216, 개정된 헌법에 따라 대통령 선거가 실시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전두환 세력인 노태우 후보가 김영삼, 김대중 후보를 누르고 당선됩니다. 김영삼과 김대중이 단일화하지 않고 각자 출마한 것이 주요한 패인이었는데, 이에 대하여는 죽쒀서 개줬다는 식의 비난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이 역시 의도적으로 김영삼과 김대중의 사이를 멀어지게 한 전두환 정권의 치밀한 공작에 따른 결과일 수도 있겠지요.

 

그 후 시간이 흘러 전두환은 김영삼 정부 시절인 199512.12 사태와 광주학살, 비자금 등에 관한 사건으로 구속수감됩니다. 검찰로부터 사형을 구형받았다가 1997417일 대법원에서 무기징역 및 추징금 2,205억 원을 선고받습니다. 그런데 19971218일 치러진 제15대 대통령선거에서 김대중 후보가 승리하고, 그로부터 나흘 뒤인 1222일 김영삼 정부의 특별사면으로 풀려났으며, 1998년 복권되었습니다(네이버 지식백과 중 전두환 부분 참조).

 

이것은 광주학살 이야기입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광주학살 이야기는 아직 현재 진행형인 이야기일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요즘 적폐청산을 두고 논란이 뜨겁습니다. 적폐세력으로 몰리고 있는 진영에서는 이를 적폐청산이 아닌 정치보복으로 규정하고 싶어 합니다. 어느 주장이 맞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아직 제대로 된 적폐청산을 한 적이 한 번도 없다는 생각은 듭니다. 해방 이후 친일파는 청산되지 않고 오히려 더 승승장구했으며, 부당하게 민주화세력과 노동자들, 그리고 무고한 시민들을 탄압한 과거의 위정자들은 그에 대하여 거의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았습니다. 전두환은 광주학살 후 오랜 시간이 지나 사법부로부터 유죄를 선고받았으나, 그가 옥고를 시작한지 얼마 지나지도 않은 시점에 당시 대통령이었던 김영삼은 국민 대화합을 명분으로 그를 특별사면하였습니다.

 

알베르 까뮈는 나치부역자 숙청을 반대하는 자들에 대하여 어제의 범죄를 벌하지 않는 것은 내일의 범죄에 용기를 주는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적폐청산은 과거를 향한 것이 아닙니다. 현재 우리들이 당면하고 있는 문제이자 우리들의 미래가 달려 있는 문제입니다. ‘정의란 무엇일까요. 사전적인 정의는 따로 있겠습니다만, 저는 정의로운 사회는 정당한 노력이 그에 합당한 인정을 받는 사회라고 생각합니다. 현재 우리 사회는 정당한 노력인정받는 사회일까요.

 

법조계를 예로 들어보면 이렇습니다. 우리나라 법조계에는 전관예우라는 것이 있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를 보면, 전관예우를 판사나 검사로 재직하다가 변호사로 갓 개업한 사람이 맡은 소송에 대해 유리한 판결을 내리는 특혜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전관변호사와 법원(내지 검찰)의 관계를 중심으로 전관예우를 규정한 것이지요. 그런데 저는 전관예우의 핵심은 여기에 있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전관예우의 핵심은 전관변호사와 국민(더 구체적으로는 법률서비스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 사이에 놓여 있습니다. 법률서비스를 필요로 하는 국민들이 비전관변호사보다 전관변호사를 더 선호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전관변호사가 비전관변호사에 비하여 더 능력이 뛰어나거나 더 많은 노력을 할 것을 기대해서일까요. 그런 경우도 있을 수는 있겠지만 대체적으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전관변호사가 자신의 사건을 맡은 판사 또는 검사와의 연고나 정실을 통해 사건을 잘 해결해 주리라는 기대가 있기 때문입니다. 연고와 정실을 통하여 손쉽게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심리. 이것이 전관예우의 본질입니다.

 

이것은 법조계에 한정된 문제가 아닙니다. 능력과 노력보다는 연고와 정실에 기대려는 심리는 우리 사회 전반에 퍼져있습니다. 문민정부 출범 이후 사람들은 이제 민주화시대가 도래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요. 한국의 근현대사에서 국민들은 한 번도 제대로 적폐가 청산되거나 정의가 바로 세워지는 경험을 한 적이 없습니다. 정의에 대한 좌절과 상실이 만연해 있습니다. 그리하여 아직도 우리 사회는 부패해 있습니다. 겉으로는 민주화시대가 도래한 것 같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민주화 이전 시대의 부패한 관행과 문화가 그대로 유지되고 있습니다. 광주의 비극을 낳은 사회적 토양이 아직 그대로 존속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아직 광주학살을 기억하고 새겨야 하는 이유입니다.

 

* 네이버 지식백과, 위키백과, 한국현대사산책 1980년대편(강준만, 인물과사상사), 바람 없는 천지에 꽃이 피겠나(문영심, 시사IN), 나의 한국현대사(유시민, 돌베개), 소년이 온다(한강, 창비)를 참고하여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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